
우리나라는 부동산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을 이룬 국가다. 산업화 시절엔 한강을 매립해 자산가들에게 소유권을 넘겨줘 아파트와 공장을 짓게 했고, 민주화 이후엔 경제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부동산을 띄워 경기 침체를 방어했다. 기업들은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실행해 사업 자금을 조달해 왔고, 개인들은 우상향하는 집값을 보며 소비를 확대해 왔다. 금융권은 부동산 시장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 놓고 돈 먹기에 집중해 왔다. 그렇게 60여 년이 흐른 지금, 영원할 것만 같았던 부동산 불패 신화에 균열이 생겼다.
지난 28일 시공능력평가 16위 태영건설이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을 갚지 못하겠다며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신청했다. 경기 침체 장기화 흐름 가운데 윤석열 정부가 부동산 시장 연착륙을 꾀하고자 지난 4월 대주단 협약을 가동해 PF 연장 정책을 펼쳤음에도 대형 건설사가 무너진 것이다. 태영건설의 PF 대출 규모는 약 3조2000억 원 수준으로 파악된다. 시장 구성원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부동산 시장 내 자금 경색의 본격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금융권으로 부실이 전이될 시 국가경제 전반에 충격을 줄 가능성도 있다. 기업들은 더 이상 부동산을 담보로 사업 자금을 조달할 수 없고, 개인들은 집값이 떨어지는 걸 보고 소비를 줄일 것이며, 금융권은 돈 놓고 돈 먹을 구석이 사라지게 될 것이어서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충격 확산을 막기 위해 태영건설 살리기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HUG주택도시보증공사를 통해 태영건설 사업장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하청업체에겐 대출 만기 연장과 금리 감면 등 혜택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사실상 국민 세금을 태영건설 구조조정에 투입하겠다는 내용이다. 불가피한 조치로 여겨지지만 국민들 사이에선 자구 노력을 제대로 하지도 않은 기업을 왜 사회적 합의도 없이 혈세로 도와주느냐는 불만도 나온다. 실제로 태영그룹 오너일가는 워크아웃 직전 자신들이 지분 대다수를 보유한 태영인더스트리를 매각해 1400억 원 가량을 챙겨놓은 상태다. 방송사인 SBS는 절대 팔지 않겠다는 방침도 내부적으로 수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정적 여론이 형성될 만한 대목들이다.
그럼에도 태영건설 살리기엔 분명 당위성이 존재한다. 이른바 '대마불사'(大馬不死)다. 대형 건설사인 태영건설이 최종 도산하게 되면 해당 업체와 연관된 수많은 국민들이 피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고, 거대 금융그룹까진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증권·보험사와 저축은행들이 파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 큰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를 방지하려면 태영건설을 최대한 구제해야 한다. 때문에 야당인 민주당도 태영건설 살리기에 협력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는 국회 정무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위원장 김종민)를 열고 올해 11월 15일로 효력이 상실된 워크아웃 제도를 오는 2026년까지 연장하는 내용의 기촉법(기업구조조정촉진법) 개정안을 의결한 바 있다.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하기 한 달 전 이 같은 재입법이 이뤄진 것이다.
하나 우려스러운 건 현재의 대마가 과연 언제까지 대마로 남아있겠냐는 것이다. 태영건설이 대마로 여겨지는 건 부동산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을 이룬 국가의 대형 건설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은 더이상 부동산이 아닐 공산이 커 보인다.
우선, 미국발(發) 고금리 현상이 앞으로도 수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오는 2024년 재선 성공 시 금리를 인하하겠다고 내세웠지만, 연방준비제도(Fed, 연준)가 기준금리를 올린 배경에 미중 무역분쟁 속 중국 정부의 미국 채권 대량 매각이 있고, 최근까지도 중국의 미국 채권 매각이 이어지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연준이 발표한 내년 금리 중간값 4.6%에서 더 떨어진다고 해도 한국은행 기준금리(3.5%)와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또한 금융권의 부동산 투자 규모가 태영건설 워크아웃을 기점으로 대폭 축소될 여지가 상당해 보인다. 레고랜드 사태도, 태영건설 워크아웃도, 위기를 초래한 본질적 원인은 금융사들의 무분별한 PF 운용이었다. 이들은 2020년 들어 부동산 리스크가 확대됐음을 인지하고도 사업성이 낮고 부실한 프로젝트에 PF를 실행해 줬다. 내년 총선 이후 금융권 책임론이 본격 대두될 전망이다. 이밖에 고물가 속 가계 소비 위축, 대출 연체율 증가, 연이은 전세사기 사태 등도 국내 부동산 시장 내 유동성을 줄게 할 요인들이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도 수년간 부동산 경기가 침체된 이후엔 저출산 문제가 시장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부동산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선 저출산에 따른 인구 감소가 부동산 대세 하락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인구가 줄더라도 1~2인 가구가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오히려 서울·수도권·광역시 등 일부 지역에선 주택 수요가 확대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 논리가 실현되기 위해선 전제조건이 많이 필요하다. 국민소득이 계속 상승해야 하고, 일자리가 늘어나야 하며, 고령화된 현 경제활동인구들이 외곽으로 이탈하지 않아야 하고, 지방 부동산 침체가 전국으로 확대되지 않을 만큼 공공·민간의 내수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1~2인 가구가 큰 고민 없이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집값이 안정화돼야 하며, 중장기적으론 결국 출산율이 회복돼야 한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투명성이 확대된 국면 속에서 과연 이 같은 조건들이 얼마나 충족될 수 있을까.
최근 기업환경이 급변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과 4차 산업혁명이 맞물리면서 오프라인의 지배력이 축소됐고, 온라인의 영향력이 대폭 확대됐다. 사실상 부동산기업인 신세계, 롯데 등 기존 우리나라 유통공룡들이 유동성 확보에 애를 먹고 있는 반면, 쿠팡으로 대표되는 플랫폼 업체들은 외국 자본으로부터 대규모 투자 자금을 조달해 급격히 성장했다. 플랫폼 기업들에게 부동산은 물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부동산과 함께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수출 제조사들은 국내가 아닌 해외 투자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국경은 점점 더 빠르게 희미해 지고, 우리나라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인재들은 더 많은 돈을 주고, 근무환경이 좋은 다른 나라로 점차 시선을 돌리고 있다. 땅덩어리가 좁은 한반도이기에, 그래도 부동산은 앞으로도 대마로 존재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덩치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며, 미래 대한민국의 성장동력 역할을 하기 버거워질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현재의 대마 살리기는 물론, 미래의 대마를 살리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부동산이 절대적인 내수 시장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꼭 부동산의 덩치를 유지하는 정책을 펼칠 필요는 없다. 다른 국가에 비해 우리나라가 확실한 경쟁 우위를 갖고 있거나, 앞으로 가질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서 초격차 기술 혁신이 이뤄지도록 기업과 금융권의 투자를 유도하고, 가계 자산의 주택 의존도를 떨어뜨리는 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부동산 시장이 위축돼도 금융 불안이 크지 않은 경제구조, 국민들이 집에 목매지 않아도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긴 호흡이 필요한 일인데, 초읽기는 이미 시작된 것 같다. 대마불사만 믿고 있다가 대마가 잡혀 대국에서 내려오기 전에, 새로운 대마를, 미래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는 진짜 대마를 지어야 한다. 다가오는 새해가 그 기점이 되길 바란다. [도박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