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측이 대주주로 있는 소유분산기업에서 장기집권했던 수장들이 연이어 자리를 내려놓고 있다. 저마다 다른 이유에 따른 퇴진이긴 하나, 정권교체 후 첫 총선이 열리기 직전이어서 외풍 의혹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것으로 보인다.
12일 DGB금융그룹(디지비 금융그룹)은 김태오 회장이 용퇴 의사를 표명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김 회장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어가고 역동적인 미래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며 이 같은 입장을 그룹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DGB금융그룹 회추위는 경영승계 절차를 개시하고 차기 회장 선임을 위한 프로세스에 돌입한 상태다.
이는 김 회장 본인을 둘러싼 논란, 그룹 내부 규범상 연령 제한, DGB대구은행의 시중은행 전환 작업 속 금융당국의 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캄보디아에서 상업은행 인가를 받기 위해 현지 공무원에게 뇌물을 전달하려 하고, 회삿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기소됐으나 지난 10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도의적인 책임에서 벗어나진 못했다는 평가다. 실제로 1심 재판부는 현지 상업은행 인허가를 얻기 위한 행위를 현행 국제뇌물방지법상 '국제상거래'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처벌이 불가하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김 회장 등이 브로커에게 건넨 돈은 분명 뇌물의 성격이 있다고 인정했다.
또한 현재 DGB금융그룹 내규상 회장직에 선임·재선임되기 위해선 '만 67세'를 초과해서 안 되는데, 김 회장은 올해로 만 69세다. 금융감독원에서 이 부분을 특히 꼬집기도 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해 10월 "회추위가 열린 뒤 현재 회장의 연임을 가능하도록 바꾸는 것은 축구를 시작하고 중간에 룰을 바꾸는 것이다. 그동안 DGB금융의 (시중은행 전환) 노력을 봤을 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더욱이 대구은행의 고객 동의 없는 불법 계좌 개설, 계열사 하이투자증권의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상품 '꺾기' 판매 의혹 등으로 대구은행 시중은행 전환을 100%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불가피하면서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김 회장이 용퇴를 결단했다는 평가다.
DGB금융지주는 여느 금융지주사와 마찬가지로 국민연금공단이 최대주주(2023년 9월 말 기준 지분율 8.07%, 2대 주주 OK저축은행 7.53%)로 있는 소유분산기업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초 "지배구조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모럴해저드가 일어날 수 있다"며 셀프연임, 장기집권 등 금융지주 등 소유분산기업들의 지배구조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최근 사령탑이 스스로 물러난 소유분산기업은 DGB금융뿐만이 아니다.
KT&G(케이티앤지)는 역대 최장수 CEO로서 4연임 도전 여부와 관련해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던 백복인 사장이 연임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고 지난 10일 밝혔다. 이에 앞서 지난 3일 행동주의 사모펀드인 FCP(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는 KT&G의 새 사장 선정 과정에 대해 '3중 바닥 철밥통 카르텔'이라고 비판하면서 백 사장의 연임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소액주주 다수가 호응하면서 논란이 확산됐다(관련 기사: [기자수첩] KT&G는 누구의 것인가).
지난해 상반기 주주명부 기준으로 KT&G의 최대주주는 지분 7.12%를 보유한 미국계 자산운용사인 퍼스트이글(First Eagle Investment Management)이나, 국책은행인 중소기업은행(IBK기업은행, 6.93%)과 국민연금공단(6.31%)의 합산 지분율이 이보다 높아 사실상 정부가 대주주 역할을 하고 있다.
외풍 의혹이 제대로 불거진 소유분산기업도 있다. 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의 반대로 구현모 전 대표이사 사장, 윤경림 대표 내정자가 차례로 사퇴한 KT(케이티)가 대표적이다.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도 국민연금이 차기 회장 선임 절차의 공정성·투명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직후 후보군에서 자취를 감췄다. 물론, 세 사람 모두 비판받을 만한 부분이 상당한 경영자이긴 했다. 구현모 전 사장과 윤경림 내정자는 현대자동차그룹 오너일가와 구 사장 친인척간 '보은성 투자' 혐의에 연루된 인물이고, 최정우 회장은 태풍 골프와 법인차 사적 용도 사용 의혹 등으로 인해 곤욕을 치렀다. 최 회장의 경우 최근 초호화 해외 이사회 의혹에도 휩싸인 상태다.
이와 관련,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최근 수장이 교체된 소유분산기업들의 사례들을 보면 명분은 확실하다. CEO 개개인에게 법적·도의적으로 문제를 삼을 부분이 존재했고, 회사 차원에서도 실적이나 주가, ESG경영 등이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부가 언급한 바와 같이 특정 인사를 위한 참호 구축, 독립적이지 않은 사외이사 등 지배구조에도 분명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며 "그럼에도 시민사회에겐 오해를 살 수 있다. 시기가 너무 미묘하기 때문이다. 수장 교체 배경을 정당·정치인에 대한 기업 정치후원금, 정치인 자리 마련 등 총선 정국과 결부하는 시선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박 종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