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소재 대한축구협회(KFA) 축구회관 건물 앞에서 정몽규 회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대한축구협회장으로서 '클린스만 사태', '올림픽 탈락' 등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축구팬들의 원성이 아니었다. HDC그룹 회장으로서 임직원들에게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라는 HDC현대산업개발 노동자들의 절규였다. 남색 조끼를 입은 HDC현대산업개발 노조원들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대한축구협회 축구회관에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따금 창문을 닫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축협 관계자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은 창문 너머로 핸드폰을 들고 노조원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HDC현대산업개발 노동조합(현대아이파크 노동조합)은 이날 대한축구협회 축구회관 앞에서 피켓시위를 진행하고 사측과 정몽규 회장에게 지난해 성과에 대한 성과급을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이 손에 든 피켓에는 '기회는 불평등, 과정은 불공정, 결과는 역차별', '애썼던 직원들은 외면하고 주주한테는 배당잔치', '경영진은 고생한 직원들에게 주주배당만큼 성과급 지급하라', '정몽규 회장은 주주배당만 확대할 계획인가. 직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실시하라' 등 내용이 담겼다.
노조가 축협에서 이 같은 집회를 단행한 이유는 HDC현대산업개발의 성과급 지급 권한이 정 회장에게 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광주 화정 아이파크 참사에 따른 후폭풍으로 2022년 1월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직에서 사퇴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지주사인 HDC 회장으로서 자회사인 HDC현대산업개발에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HDC 정관에는 '자회사 등의 경영성과의 평가 및 보상의 결정', '자회사 등의 업무와 재산상태에 대한 검사' 등 사업을 영위한다고 명시돼 있다. HDC현대산업개발이 임직원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하려면 정 회장의 결재가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측과의 교섭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HDC현대산업개발 노조는 올해 초 임단협(임금·단체협약 협상)에 돌입할 때부터 사측에 성과급을 강력하게 요구해 왔다. 2022년엔 중대재해가 발생해 성과급 지급이 중단됐으나 2023년에는 1729억 원 규모 당기순이익을 낸 만큼, 성과급을 원상복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성과급 원복은 경영진의 약속이기도 했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다. 하지만 사측은 이 같은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지난 3월 성과급 지급 불가를 노조에 통보했다. 이어 같은 달 열린 정기주주총회에서 최익훈 HDC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는 "성과급 지급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후 HDC현대산업개발 노조는 중앙노동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지만 중노위 조정조차도 지난 7일 최종 결렬됐다. 그리고 이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서장석 HDC현대산업개발 노조위원장은 "회사는 지난해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으면서 2023년도 성과가 개선되면 성과급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몽규 회장도 성과가 나면 성과급을 지급하겠다고 직원들을 대상으로 과거에 약속한 바 있다"며 "하지만 사측은 직원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할 수 없다면서 그 사유로 영업이익률 두 자릿수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2021년에도 영업이익률이 8%였는데 성과급을 110% 지급한 선례가 있음에도 말이다. 성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으려고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 위원장은 "직원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으면서 사측은 주주들에게 2023년 전년 대비 약 17% 인상된 배당금을 지급했으며, 향후에도 순이익의 20% 이상을 지속 배당하겠다고 공시했다. 매출 달성과 영업이익 창출에 기여한 내부 고객인 직원들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이것은 어려운 여건 하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사기를 꺾고, 경영진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또한 광주 사고에 대한 책임을 모두 직원들에게만 돌리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지난해 업황 침체 가운데에도 성과를 낸 직원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한 다른 건설사들과 비교되는 행보다. 본지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현대건설은 직원 1인당 순이익 0.91억 원을 기록했는데 성과급 100%를 지급했다. 직원 1인당 순이익 0.88억 원을 기록한 대우건설, 0.36억 원을 기록한 쌍용건설은 각각 180%, 100%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줬다. 같은 기간 HDC현대산업개발의 직원 1인당 순이익은 0.91억 원이다. 노조가 불만을 제기하는 배경이다.

이와 관련해 HDC현대산업개발은 성과급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직원들의 성과를 인정해 주기로 역제안했다는 입장이다. 피켓시위 현장에서 만난 HDC현대산업개발의 한 관계자는 "중노위 조정 전부터 성과급 지급은 당장 어렵고, 임금 인상률을 통상의 2배에 해당하는 4%로 맞춰주겠다고 노조에 제시했다. 현금 대신 현물로 지급하겠다는 얘기도 협상 과정에서 나왔었다"며 "그러나 노조에서는 성과급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 성과급 지급은 지주사인 HDC가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사측의 입장에 대해 노조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HDC현대산업개발 노조의 한 관계자는 "급여는 올릴 수밖에 없는 거다. 다른 대형 건설사들에 비해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고, 회사도 어렵고 하니까 인재들을 뽑으려고 해도 인재가 들어오질 않는다. 이런 실정이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서 성과급은 사실상 급여성이다. 성과급을 주지 않으면 다른 건설사들과 비교했을 때 연봉이 너무 큰 차이가 난다"며 "사측은 올해 광주 화정 아이파크 철거 상황, 대형 프로젝트인 광운대 역세권 분양 추이를 지켜본 후 성과급 지급을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건 지난해 성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인데, 사측에선 올해 하반기에나 있을 상황들을 검토한 뒤 성과급 지급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다. 앞뒤가 안 맞는 논리"라고 꼬집었다.
또한 "2022년에 성과급 지급을 중단했을 때 2023년에는 주겠다고 했다. 그런에 이제 와서는 올해 잘 되면 내년에 성과급을 주겠다고 한다. 계속 미루고 있는 것이다. 노조가 사측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느냐"며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정 회장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성과급 지급 결재를 정 회장이 해줘야 한다. 그런데 회장이 직원들을 원망한다고 하더라. 광주 참사 책임은 다 직원들에게 있고, 직원들이 회사를 어지럽게 만들었는데 왜 내가 직원들에게 성과급을 줘야 하느냐 이런 입장이라고 들었다. 어느 기업의 오너 경영인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비용 절감하겠다고 공기 줄이고, 인원 줄이는 방식으로 기업 운영한 게 누구인가. 본인이 잘못 운영한 결과라고 생각해야지 직원들을 원망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HDC현대산업개발 노조는 오는 21일에는 서울시청 앞에서 피켓시위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후에도 사측이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시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파업 찬반 투표를 실시한다는 방침이다. HDC현대산업개발 노조는 지난해 7월 창사 이래 첫 파업에 나선 바 있다. 이번에 파업이 결정되면 두 번째 파업이 이뤄지는 것이다. HDC현대산업개발 노조는 중노위 조정 결렬에 따라 현재 파업권을 획득한 상태다.
서 위원장은 "회사에 이익을 창출해 주는 주체는 주주가 아니라 고객과 임직원임을 경영진이 깨달아야 한다. 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배려할 때 회사는 더욱 성장할 것이다. 노조는 사측이 진심으로 직원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때까지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팅 사이트]